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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 칼럼 2017-08-24T14:04:31+00:00

원장님 칼럼

"여보, 나 왓어요"

작성자
성로요양병원
작성일
2018-03-14 14:21
조회
53
“여보, 나 왔어요”

“락트인 증후군(locked in syndrome)”이라는 병이 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괴로운 상태라고 나는 확신한다. 감각기능은 남아있는데, 운동기능은 전혀 없는 상태이다.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오직 눈꺼풀뿐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보고 듣고 생각하면서, 꼼짝도 할 수 없는데 죽어야 끝나는 그 답답한 고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원인은 여러 가지 있는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뇌에 이상이 생겨서 오는 병이다. 프랑스의 배우 쟝 도미니끄 보비가 뇌졸중후에 이 병에 걸린 후 눈을 깜박이는 것만으로 쓴 회고록, “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는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다. 보비가 회고록을 작성하는 데 눈을 깜박이는 횟수가 20만번이 넘었다고 한다. 서론이 길어졌는데, 상식하나 얻은 셈 치자.
우리병원에서 내가 치료하는 환자 중에 이런 환자가 있다. 한때 신문 방송에서 꽤 이름을 날리던 분인데 재작년 10월에 입원해서 지금까지 누워 계신다. 입원하실 때 89세였으니 해가 바뀌어 금년에 91세, 우리병원에 누워 계신지 1년 6개월 동안 아무것도 못하신다. 가족들도 나을 희망은 없고 치료비만 계속 들어가고 있으니, 차마 말은 못하지만 그만 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가족도 가족이지만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은 자신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치료하는 나도 마찬가지이다. 희망도 없고 보람도 없는 일을 한다. 이렇게 환자, 가족, 의사 세 주체가 모두 원치않는 일을 하고있다.
지난 해 11월 독감이 돌더니 이분도 독감에 걸렸다. 많은 종말기환자가 그렇듯 독감은 폐렴이 되었다. 어쩌면 잘됐는지도 모른다. 가족들도 말은 안하지만 드디어 찾아온 기다리던 때를 반기는 눈치였다. 나는 기계적으로 약을 처방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고. 마침내 패혈증까지 발전했다. 패혈증(敗血症)이란 글자에서 보듯, 혈액이 졌다는 말이다. 알다시피 병과 싸우는 군사는 혈액이고, 약은 혈액을 응원하고 전투력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패혈증이란 혈액이 병균에게 졌다는 말이고, 끝났다는 말이다. 형식적이지만 패혈증에 대한 치료도 했다. 어차피 나을 희망은 없으니 이젠 시간만 보내면 된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시간이 약이다”라던가?
그런데 이게 웬일? 슬슬 열이 내리더니, 끓어오르던 녹색 객담도 줄어든다. 녹색 객담이 누런 객담보다는 훨씬 악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그러더니 눈을 떠서 침대 머리맡에 걸린 크리스마스 장식을 바라본다. 그 눈에 전에 없던 생기가 돈다. 사람의 생명은 사람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 깨닫는 순간이다. 몇일 후 환자의 아들에게서 꼭 드릴 말씀이 있다는 청이 있어 만났다. 그가 말했다.
“어머니가 ‘여보 나 왔어요. 눈 좀 떠 보세요’라고 말씀하시니 눈을 뜨시는데,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거에요. 눈빛이 맑은 환희의 눈물이었어요. 우리를 만나는 기쁨이 있었던 거에요. 저렇게라도 살아서 가족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그간 저희가 잘못 생각했어요. 오래 사시게 해주세요.”
고통 속에서 더욱 빛나는 부부의 사랑앞에 내 눈시울도 젖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