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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 칼럼 2017-08-24T14:04:31+00:00

원장님 칼럼

고마운 손

작성자
성로요양병원
작성일
2017-11-29 16:32
조회
220
고마운 손

김 석 대 (신경정신과 전문의, 의학박사)

천원으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봅니다.
라면 두봉지로 두사람의 배를 채우고, 몸을 녹일 수 있습니다.
혼자라면 달걀을 풀어 넣고도 자판기 커피한잔이 남습니다.
빵 한개에 우유 한팩으로 서양식 식사 한끼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지하도 입구에서 파는 은박지에 싼 김밥 한줄로 출근길이 뿌듯합니다.

봄나들이에는 솜사탕이 있으면 더욱 화창합니다.
아이스 바 하나씩 빨며 둘이 키득거려도 좋고, 쌍쌍바 두개면 한가족 네식구가 즐겁습니다.
귀가길에 손주녀석 줄 호떡을 두개나 살 수 있습니다. (붕어빵은 네개라네요)
시외전화로 부모님께 문안인사도 드립니다.

뒷장에 그려진 도산서원의 마당 쓰는 사람을 찾는 게임도 재미있습니다.
그사람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다보면 시간이 금방 가버립니다.
(이쯤에서 호주머니에서 천원짜리를 꺼내 들여다보며 빗자루 든 사람을 찾아 눈을 크게 뜬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찾으셨나요?)

서너 해 되었는지 더 되었는지 기억이 분명치 않은 어느해 겨울, 크리스마스 이브의 퇴근길이었습니다.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서둘러 전철에 올랐습니다.
몇 정거장 지났을까요,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전철에서 들리는 노랫소리가 무얼 말하는지는 잘 알지요?
어떤 노인이 손바닥만한 녹음기를 목에 걸고 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린 비닐 바구니 속에는 하얀 동전 몇닢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나는 평소에 걸인들에겐 무심한 편입니다.
그들 뒤에는 어마어마한 조직이 있다는 어두운 얘기들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크리스마스였습니다.
호주머니에서 천원짜리 한장을 꺼내 그의 풀색 비닐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내가 넣은 낡은 천원짜리 한장이 비닐 바구니에 우뚝 서더니 갑자기 우쭐하니 뻐기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있던 하얀 동전닢들을 거느리고 호령하는 위세가 찌렁찌렁 울리는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본 중에서는 가장 크게 출세한 천원이었습니다.

도움을 받으려면 도움을 주는 사람보다는 훨씬 구차하고 어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도움을 주는 사람보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훨씬 힘듭니다.
또 수치스럽기도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어렵고 힘들게 사는데다가 수치스러움을 참아가며 남의 도움을 받고, 상대에게는 복 받을 기회로 갚아줍니다.

나를 도와주는 손은 고마운 손입니다.
나의 도움을 받는 손은 더욱 고마운 손입니다.



-후기-

한가지 더, 천원짜리 뒷장에 그려진 도산서원 마당 말인데요.
청소하는 사람이 없고서야 그리 깨끗할 수가 있나요?
어디엔가 있을 것 같아 찾아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진 않더군요.
그러나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는 없더라구요.
아마 방에 들어가서 곰방대라도 빨고 있나보지요?

그동안 귀한 지면을 부족한 제게 할애해 주신 파도소리 편집위원 여러분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또한 변변치 않은 제 글을 사랑하시고 퍽이나 오랫동안 읽어주신 사랑하는 벗님들의 많은 손길들, 내겐 참으로 고마운 손들입니다.